언제부턴가 갈대는 속으로조용히 울고 있었다. 그런 어느 밤이었을 것이다. 갈대는그의 온몸이 흔들리고 있는 것을 알았다. 바람도 달빛도 아닌 것,갈대는 저를 흔드는 것이 제 조용한 울음인 것을까맣게 몰랐다. - 산다는 것은 속으로 이렇게조용히 울고 있는 것이란 것을그는 몰랐다. - 신경림, ‘갈대’ 전문 1956년 에 발표된 이 시는 시인이 스무 살 때 쓴 처녀 작품이다. 시인은 충주고 시절, 국어시험시간에 시험지 대신 시를 제출할 정도로 문학 열병이 뜨거웠다. 대학 때 등단 후 지독한 생활고로 10년간 문단과 멀어진 채
살을 에는 겨울추위에 지친 인간은 제각기 자신만의귀가길을 서두르는데왜 눈은 하얗게 하얗게 내려야만 하는가 하얗게 하얗게 혼신의 힘을 기울여바닥을 향해 투신하는 눈눈은 낮은 곳에 이르러서야비로소 녹을 줄을 안다 - 오세영, ‘눈’ 중에서 깊은 백색의 골짜기를 메우며굵은 눈발은 휘몰아치고,쬐그마한 숯덩이만한 게 짧은 날개를 파닥이며……굴뚝새가 눈보라 속으로 날아간다. 길 잃은 등산객들 있을 듯외딴 두메마을 길 끊어놓을 듯은하수가 펑펑 쏟아져 날아오듯 덤벼드는 눈,다투어 몰려오는 힘찬 눈보라의 군단,눈보라가 내리
이럴 때가 있다일도 안 풀리고 작품도 안 되고울적한 마음으로 산길을 걸을 때툭, 머리통에 꿀밤 한 대아프다 나도 한 성질 있다언제까지 내가 동네북이냐밤나무를 발로 퍽 찼더니후두두둑 수백 개의 밤톨에 몰매를 맞았다울상으로 밤나무를 올려봤더니쩍 벌어진 털복숭이들이 하하하 웃고 있다나도 피식 하하하 따라 웃어 버렸다매 값으로 토실한 알밤을 주머니 가득 담으며고맙다 애썼다 장하다나는 네가 익어 떨어질 때까지살아나온 그 마음을 안다시퍼런 침묵의 시간 속에 해와 달을 품고어떻게 살아오고 무엇으로 익어온 줄 안다이 외진 산비탈에서 최선을 다해온
꿈을 아느냐 네게 물으면,플라타너스,너의 머리는 어느덧 파아란 하늘에 젖어 있다.(중략)먼 길에 올 제,홀로 되어 외로울 제,플라타너스,너는 그 길을 나와 같이 걸었다.(중략)수고론 우리의 길이 다하는 어느 날,플라타너스,너를 맞아줄 검은 흙이 먼 곳에 따로이 있느냐? 나는 오직 너를 지켜 네 이웃이 되고 싶을 뿐,그곳은 아름다운 별과 나의 사랑하는 창이 열린 길이다.- 김현승, ‘플라타너스’ 중에서 이 시는 플라타너스를 대상물로 하여 “네게 물으면”이라는 의인화를 통해 시인의 내면을 투영하고 있다. 이 시
가을에는기도하게 하소서.낙엽들이 지는 때를 기다려 내게 주신겸허한 모국어로 나를 채우소서. 가을에는사랑하게 하소서.오직 한 사람을 택하게 하소서.가장 아름다운 열매를 위하여 이 비옥한시간을 가꾸게 하소서. 가을에는호올로 있게 하소서. - 김현승, ‘가을의 기도’ 중에서 이 시는 김현승 시인의 1957년 첫 시집 ‘김현승 시초’에 실려 있다. 삼라만상의 종말을 알리는 가을을 맞아 내적 깨달음과 충실을 갈망하는 기도시다.낙엽 지는 가을, 마음 휑할 때 읊조리기에 제격인 시다. 숲에서 한 잎 두 잎 낙엽 지고 마지막 가지까지 탈탈탈 털어
암컷이 유속에 흔들리며 수초 물어 나르기에 분주하다그렇게 수초 둥지에 알을 낳고 죽어간 빈자리에수컷이 밤낮없이 흰 지느러미를 흔들어 쌓는다물살에 뒤틀리면 돌멩이에 몸을 걸치고 다시금부화를 위해 줄창진 저 지느러미의 부채질20여 일을 꼬박 밤새워 흔들어 쌓던 지느러미가파랗게 멍들어 숨을 멈추던 날수초더미에서는 가시고기 새끼들이 눈을 뜨고 있었다치어들이 아비의 몸을 뜯어가며 세상에 눈뜨던 저 신성한 제례 앞에서는어느 물고기도 아가미를 벌리지는 못했다유어들이 어미의 속살로 세상 물살 헤치는 동강 섶다리에아이들이 끌고 가는 송아지의 울음
아버지는 새 봄맞이 남새밭에 똥 찌끌고 있고어머니는 어덕배기 구덩이에 호박씨 놓고 있고땋머리 정순이는 떽끼칼 떽끼칼로 나물 캐고 있고할머니는 복구를 불러서 손자 놈 똥이나 핥아 먹이고나는 나는 나는몽당손이 몽당손이 아재비를 따라백석 시집 얻어보러 고개를 넘고- 서정춘, ‘백석 시집에 관한 추억’ 전문한국적 토착정신이 시에서조차 사라져 가고 있다. 국적 불문의 은어와 사적 말장난이 ‘스토리텔링’으로 포장돼 가락 없는 노래들이 아우성친다.서정춘 시인의 ‘백석 시집에 관한 추억’은 이즈음 문학풍토와 세태를 곱씹게 하면서 토속어의 맛과 언
바다는 무녀휘말리는 치마폭 바다는 광녀산발한 머리칼 바다는 처녀푸르른 이마 바다는 희녀꿈꾸는 눈 7월이 오면 바다로 가고 싶어라바다에 가서미친 여인의 설레는 가슴에안기고 싶어라 바다는 짐승눈에 비친 푸른 그림자 - 오세영, ‘7월’ 전문 바다는 한 번은 비워내고 비운 만큼 채운다. 그렇게 썰물과 밀물이 공전하며 수평을 이룬다. 때로 해풍에 뒤집어지고, 아무 일 없는 듯 잔잔한 바다에는 우리네 세상살이를 재현한다.섬에서 태어나 30년 넘게 섬 여행을 즐기는 이유는 그런 바다에 무한한 삶의 기표들이 나부끼고 생동하기 때문이다. 울적하고
여기서부터, - 멀다칸칸마다 밤이 깊은푸른 기차를 타고대꽃이 피는 마을까지백년이 걸린다- 서정춘, ‘죽편(竹篇) 1-여행’ 전문 시란 본디 짧은 형식이지만 서정춘 시인의 시는 짧으면서 강한 울림이 있다. 메시지는 서정적 가락을 타고 풍경화로 연출된다.숱한 사연들이 한 매듭 한 매듭 맺고 비워지면서 성장하는 대나무는 비운만큼 더 높은 하늘로 푸른 꿈을 키운다. 대나무는 그렇게 백 년에 한 번 꽃을 피우고 죽는다.시인은 대통 속 매듭을 ‘칸칸마다 밤이 깊은 푸른 기차’로 은유했다. 키가 커가는 과정은 어두운
도봉산에서 사패산 잇는 능선은 온통 빙판이었다넘어지지 않으려는 사람들이 바위 사이에 어깨 기대지만니스 칠처럼 얼음 반지르르 깔아 무심한 화성암(火成岩)바람에 식히고 언 마그마 위에 햇살 쨍그랑 깨진다망월사 종소리 등성이 굽어 내려가고발 시린 눈발이 참나무 줄기를 타고 올라가 산길을 댕겨 쌓는다눈길 찍은 자리 밤새 아픈 상처를 빙판으로 다독였을 산길그 아픔의 시간들 더 어쩌지 못해 허공에 길을 내고눈꽃을 피웠을 것이다깨달음의 눈물 흘렸을 것이다산길이 응달 아래 사리처럼 고드름을 까놓고생목으로 젖어가는 소리 들린다우듬지에 푸른 봄날 흔
내가 초등학교 기간제 교사로 나갈 때아침나절, 우악스런 남자가 남녀 두 아이의 멱살을잡아끌고 들어와 내 앞에 확 풀어 놓는다(중략)꼬리연, 너 이 지상에서 무슨 완전한 것을 보았느냐얇은 종이에 긴 꼬리를 달아 너를 떠나보내며 소원을 빌지만아이들 이빨에 밴 니코틴 사이로 비웃음만 새어나올 뿐가출한 엄마의 속옷을 입고 있는 여아와매일 술에 취해 모두를 때려 부수는 아빠를 아빠라 부를 수 있는지 묻는파르르 떠는 눈썹 짙은 아이를 바라만 본 나는저 육체의 쾌락과 탕진을 소멸해줄 어떤 영혼이 내게 달라 붙어줄지창백한 하늘만 바라보았다내 안에
만리 길 나서는 길처자를 내맡기며맘 놓고 갈 만한 사람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온 세상이 다 나를 버려마음이 외로울 때에도“저 맘이야”하고 믿어지는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탔던 배 꺼지는 시간구명대 서로 사양하며“너만은 제발 살아다오” 할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불의의 사형장에서“다 죽어도 너희 세상 빛을 위해저만은 살려 두거라” 일러 줄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잊지 못할 이 세상을 놓고 떠나려 할 때“저 하나 있으니” 하며빙긋이 웃고 눈을 감을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온 세상의 찬성보다도“아니”하고 가만히 머리 흔들 그
오십 줄 다 되도록 이만큼 버텨 왔다면 한세상 용케도 잘 살아왔다는 그 말씀. 세상이 온종일 아우성치는데 메마른 땅에서 샘물을 파듯 너는 오늘도 한 뿌리 시를 찾아 헤매고 있나.- 이승철, ‘어느 지천명의 비가’ 중에서 이 시는 이승철 시인의 시집 ‘그 남자는 무엇으로 사는가’에 실려 있는 작품이다. 나는 1987년 민주화운동 현장에서 시인과 인연을 맺었다. 긴긴 시간이 흐르는 동안 이따금 전화통화만 해오다가 올 가을 초입에 시인에게 안부전화를 걸었다. 그렇게 인사동에서 한 잔 술에 추억의 날들을 안주로 삼아 되새김질
빨랫줄처럼 안마당을 가로질러꽃밭 옆에서 세수를 합니다, 할머니는먼저 마른 개밥 그릇에물 한 모금 덜어주고골진 얼굴 뽀득뽀득 닦습니다수건 대신 치마 걷어올려마지막으로 눈물을 찍어냅니다이름도 뻔한 꽃들그 세숫물 먹고 이름을 색칠하고자두나무는 떫은맛을 채워갑니다 얼마나 맑게 살아야내 땟국물로하늘 가까이 푸른 열매를 매달고땅 위, 꽃그늘을 적실 수 있을까요 - 이정록, ‘세수’ 전문 이정록 시인의 시집 ‘풋사과의 주름살’(문학과 지성사, 1996)에 실려 있는 작품이다. 어린 시절 고향집에는 스테인리스 세숫대야와 찌그러지고 양은 세숫대야가
징검다리 위에 검정물오리 떼가 돌멩이처럼 앉아있다 한 마리가 풍덩 물속으로 뛰어 든다또 한 마리가 또, 또 한 마리가 풍덩풍덩가라앉았다 떠오른다 그 옆에 하얀 백로가 사뿐히 내려와 한 발로 섰다물오리들 다시 징검돌 위로 올라앉는다 백로, 긴 머리를 물속에 잠궜다 들어 올리고 또 잠궜다 들어 올리고는날아오른다 백로 날자 다시 물속에 드는 물오리 떼들나는 저 새들의 생업활동을 낭만적으로 바라보고 있다 물오리와 백로, 물속의 밥 나눠먹는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을 보고 있다 - 최도선, ‘돌 위의 새들’ 전문 이 시는 70~80년대 개울
걷이 끝난 들판에 누군가 서서눈물 뿌리지 않는다면새 봄에 돋는 싹이 어찌사랑일 수 있으랴 수수깡 빈 대궁인 채 바람에 날리며잿빛 산등성이 등지고 기인 그림자 끄는네 몸뚱이, 죽어또 죽어 땅에 몸 눕히면구름만 덮일 뿐 모두 다 떠나가는데 계절의 끄트머리에 누군가 서서함께 비 젖지 않는다면어찌썩어 다시 생명일 수 있으랴 - 박형진, ‘다시 들판에 서서 2’ 전문 변산반도 모항은 한적한 어촌이다. 동구 밖엔 시나브로 바닷물이 첨벙댄다. 그래서 어느 시인은 모항에 가면 바다를 보듬고 하룻밤을 잘 수 있다고 노래했다. 뒷동산은 천연기념물 호
천년 전에 하던 장난을바람은 아직도 하고 있다.소나무 가지에 쉴 새 없이 와서는간지러움을 주고 있는 걸 보아라아, 보아라 보아라아직도 천년 전의 되풀이다. 그러므로 지치지 말 일이다.사람아 사람아이상한 것에까지 눈을 돌리고탐을 내는 사람아. - 박재삼, ‘천년의 바람’ 전문 박재삼 시인의 세 번째 시집 ‘천년의 바람’ 표제작이다. 1974년 민음사에서 출간됐고 1998년 같은 출판사에서 ‘박재삼시전집’으로 다시 선보였다. 박재삼 시인은 토속적, 향토적인 시정시를 생산했다. 특히 자연과 설화에 남다른 경지를 보이며 여백의 미학을 노래
기차가 멎고 눈이 내렸다 그래 어둠 속에서번쩍이는 신호등불이 켜지자 기차는 서둘러 다시 떠나고(중략) 우리가 내리는 눈일 동안만 온갖 깨끗한 생각 끝에역두(驛頭)의 저탄 더미에 떨어져몸을 버리게 되더라도배고픈 고향의 잊힌 이름들로 새삼스럽게서럽지는 않으리라 그만그만했던 아이들도미군을 따라 바다를 건너서는더는 소식조차 모르는 이 바닥에서 더러운 그리움이여 무엇이우리가 녹은 눈물이 된 뒤에도 등을 밀어캄캄한 어둠 속으로 흘러가게 하느냐바라보면 저다지 웅크린 집들조차 여기서는공중에 뜬 신기루 같은 것을발밑에서는 메마른 풀들이 서걱여 모래
울고 싶어도못 우는 너를 위해내가 대신 울어줄게마음놓고 울어줄게 오랜 나날네가 그토록사랑하고 사랑받은모든 기억들행복했던 순간들 푸르게 푸르게내가 대신 노래해줄게 - 이해인, ‘파도의 말’ 중에서 누군가에게 어깨 기대고 싶을 때, 외롭고 쓰라린 이 내 마음을 대신 표현해줄 때처럼, 든든하고 고맙고 행복할 때가 또 어디 있으랴.시인은 파도를 통해 그런 사람의 마음을 대변하고, 위로와 격려의 마음을 전한다. 부서지는 파도소리는 그냥 부서지는 것이 아니다. 너를 위하여, 말 못하는 너의 속울음을 위해, 크게 더 크게 부서지면서 대신 울어주
산이 날 에워싸고씨나 뿌리며 살아라 한다.밭이나 갈며 살아라 한다.어느 산자락에 집을 모아아들 낳고 딸을 낳고흙담 안팎에 호박 심고들찔레처럼 살아라 한다.쑥대밭처럼 살아라 한다.산이 날 에워싸고그믐달처럼 사위어지는 목숨구름처럼 살아라 한다.바람처럼 살아라 한다.- 박목월, ‘산이 날 에워싸고’ 전문 박목월 시인은 1916년 경북 고성에서 태어나 경주에서 자랐다. 동시인으로 활동하다가 1939년 지를 통해 시인으로 데뷔했다. 이 작품은 1946년에 출간된 ‘청록집’에 실려 있다.이 시는 박목월 시인 작품의 특징인 단순한 문장과